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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지청천(池靑天)이 지휘하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전자령을 지나는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 


1930년 홍진(洪震)·지청천·신숙(申肅) 등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중국호로군 사령관(中國護路軍司令官)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중국 의용군이 분화함에 따라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중한연군토일군(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2년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은 연합하여 쌍성보(雙城堡)·사도하자(四道河子)·동경성(東京城) 등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동경성전투 이후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시세영(柴世榮) 부대는 1933년 6월 25일경 동서검자에 이르렀다. 여기서 연합군은 대전자에 주둔 중인 일본 19사단 소속 간도파견군이 연지시엔[延吉縣]으로 철수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연합군은 3일간 100㎞를 행군하여 28일경 대전자 북방 노모저하(老毋猪河)에 도착하였다.


연합군은 부대를 3분하여 각 요지에 배치하였는데, 공격의 주동은 한국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이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며 30일까지 매복하였다. 30일 아침 6시경 일본군은 많은 장비를 가지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1시경 일본군 전초부대가 대전자령 깊숙이 들어왔다.


일본군 후미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연합군은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대부분 총탄에 쓰러졌으며, 4시간의 격전 끝에 연합군은 일본군의 군복 3,000벌,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1932년 9월 20일과 11월 17일에서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이 연합해 하얼빈[哈爾濱] 서남방의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산하 한국독립군은 난관을 겪으면 서도 북만주 일대의 동포들을 기반으로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함께 각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투쟁하였다

 

쌍성보는 장춘(長春)∼하얼빈 간 철도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만주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제침략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쌍성보전투 당시 한국독립군은 총사령 지청천(池靑天)과 부사령 김창환(金昌煥), 참모장 신숙(申肅), 그리고 조경한(趙擎韓)·최악(崔岳)·안종명(安鍾鳴)·심만호(沈萬湖)·차철(車澈) 등이 거느리는 각 지대가 합류해 500명 내외의 병력이었다. 중국 측 항일의용군 부대는 가오펑린[考鳳林] 등이 거느리는 수천명의 길림자위군 제1·제2·제3군과 훙창대[紅槍隊]·헤이창대[黑槍隊] 등의 종교세력 항일의용군도 참가해 2만∼3만명에 달하였다.

 

 한국독립군은 2차 쌍성보전투 후반에 비록 고전했지만,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해 1차 쌍성보 전투에서 대승하는 등 일제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 전투는 이후 한중 양민족의 공동전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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